[커피私傳_08] 중력_GRAVITY


중력_GRAVITY

 

커피는 타 먹는 걸까, 내려먹는 것일까. 그동안 한국인에게 커피는 확실히 ‘타 먹는’ 음료였다. 다시 말해 타서 마시는 인스턴트커피가 한국인의 입맛을 장악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믹스커피로 불리는 즉석커피가 커피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데, 즉석커피의 대중화가 바로 ‘커피를 타 먹는’ 행위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선 인스턴트커피의 인기가 높을까? 강준만과 오두진의 저서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에 의하면 한국인이 원래부터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던 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인스턴트커피는 산업화 및 대중 소비 시대의 산물이라 과거에는 없었지만 이는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 해당되기에 우리만의 이유라고 보긴 어렵다. 이 책에선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들이 먹었던 인스턴트커피가 한국 시장에 풀리면서 한국 커피 시장이 태동하게 됐다고 한다. 전후 인스턴트커피를 비롯한 미국의 인스턴트식품은 빠른 속도로 한국 사회에 파고들었다. 하루빨리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는 시대적 상황과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우리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은 마법과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러한 미군 부대 PX는 동경하던 미국 문물에 접근할 수 있는 ‘세련된’ 창구이기도 했다. 구한말에 접했던 고종 황제의 원두커피와 달리 전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미국의 인스턴트커피를 받아들인 것이다. 커피를 내려먹는 게 아닌 타 먹는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커피를 ‘타 먹는’ 문화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성장에 맞춰 생활 곳곳에 파고들었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는 습성에 인스턴트커피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이후 그간 사회를 지배해오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활 방식이 나타났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경제 성장 속도에 맞춰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숨을 고르고, 자신들의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슬로 라이프. 슬로 라이프는 인생에선 속도보다 방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돈과 성공이라는 가치에 천착하는 삶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란 내면적 고민이 시작된 셈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 커피가 재발견되었는데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들이 주목한 건 이른바 핸드드립이라는 내려먹는 추출 방식의 커피였다. 커피를 내려 마시게 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커피도 ‘음식’이란 본질적 자각에 이르게 된다. 타 먹는 커피에서 내려먹는 커피로의 이행. 이것은 한국인에게 음식 혁명과도 같다.

재밌는 건 지난 20년 간 빠른 속도로 전 세계 커피 시장을 장악해왔던 스타벅스에 새로운 도전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점인데, 이들이 대개 내세우는 게 핸드드립 커피와 커피 원두의 고급화 전략이다. 최근 IT 전문 투자기관으로부터 800억을 유치해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의 블루보틀 커피가 대표적이다. 블루보틀은 스타벅스처럼 매장이 많지도 않다. 20여 개 남짓의 초라한(?) 숫자지만 이들은 무서운 기세로 미국인과 일본인의 커피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어떤 면에선 인스턴트커피의 빠른 속성을 이어받은 에스프레소(란 이태리어는 빠르다는 의미다) 중심의 스타벅스도 슬로 커피 문화의 커다란 변화를 수용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핸드드립에 열광하는 것일까? 핸드드립처럼 내려 마시는 방식이 산지별로 다양한 커피 맛과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커피 추출이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핸드드립의 인간적 속도와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핸드드립으로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스턴트나 에스프레소 커피에 비해 시간이 다소 더 필요하다. 바쁜 일상 속에 기다림이 요구된다. 대신 어떠한 인위적 에너지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구의 중력으로 커피 한 잔이 완성되는데 바로 이러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온라인 시대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 같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면 그 순간만큼은 의식이 명료해지고 이 순간의 커피 향은 영혼을 공명한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깨달았다는 중력의 존재가 삶에 깊이 개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는 중력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말해준다. 허블 망원경을 고치러 우주정거장에 올라간 스톤 박사(샌드라 블록 분)가 뜻밖의 사고를 겪고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긴데 무중력 상태에서 몸부림치던 인간이 지구에 도착해 땅을 딛고 우뚝 설 수 있는 건 바로 중력 때문임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아이를 잃어 부유해오던 자신의 삶이 바로 설 수 있게 해 준 것도 중력임을 상기시켜준다. 물론 중력 때문에 인간은 노화하기도 한다. 주름이 생기고 무릎이 약해진다. 하지만 이런 노화마저도 우리가 인간임을 자각하게 한다. 노화 현상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함께 견뎌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력 없이는 존재 자체가 힘든 생명체인데, 지구 중력을 이용해 커피를 내리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은 이렇게 사람의 중력에 심리적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중력이 낳은 핸드드립 커피는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우리를 더욱 잡아당길 것이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며.

 

[전광수커피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리다]

 

글쓴이 :소보로
커피 외계도래설 주창자. 전광수커피 ‘커피와’ 웹진 편집장. 커피 잡문집 <커피는 원래 쓰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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