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었다. 발표되던 밤, 배고팠던 난 닭을 시켜서 맥주와 함께 흡입하고 있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어린 시절 무한재생되던, 지금은 고인이 된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이 "쎄울!" 하고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발표하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영화도 아닌데 그 그림은 왠지 클리셰가 된 것만 같아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장면이나 비키니 섬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장면처럼 머릿속에 고정되어있다.

트위터를 확인하니 트친 한 분의 촌철살인. '다들..... 나이계산하고 있다;;' 하하, 그 멘션 덕분에 '2018년엔 김연아가 몇 살이지?' '난 몇 살이지?' 등등을 계산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거다. (어이없게 7을 더하는 대신 8을 더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다음 날 아침. 난 아직도 올해가 2010년이라고 믿고 있었다. ㅠ.ㅠ) 그래서 오늘은 과거의 어느 순간들로 가볼까 한다. 뽀록나겠지만 나이는 묻지 말아달라.

가끔 어떤 밴드의 '가장 자기답지 않은 곡'이 가장 히트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Radiohead의 'Creep'이 그렇고, Smashing Pumpkins의 '1979'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만 들으면 빌리 코건, 발라드가수 같다. 쇳소리는 여전하지만) 말랑말랑하면서도 센티멘탈한 연주, 아련한 전주와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 그리고 뇌의 뒤쪽으로 사라지는 듯해서 가지 말라고 붙잡고만 싶은 후주. 가사는 읽어도 해독불가지만, 뮤직비디오를 보면 누구나 어릴 적 저지르고 동창회 나가서 웃으며 얘기하는 '젊은 날의 뻘짓'이 노래의 포인트일 듯.

1979년. 난 초등학생이었다. 국민학생이라고 불렸던 그때 초등학생은 요즘과는 많이 달랐다. 공부는 필수라기보다는 '잘하면 좋은 것' 정도였고, 일제고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여름 밤에 반드시 찾아오는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을 본 다음 날 아침엔 전교생이 구미호 얘기로 술렁이던 때였다.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엄마가 무슨 반찬을 해줄까 궁금했고, 아빠가 퇴근할 때 부스럭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오시면 파르르 뛰어나가 들여다보곤 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다웠던 시절.

한 시대를 풍미하던 밴드 Van Halen의 <1984>에서 히트했던 노래 'Jump'. 지금 보니 꽤 발랄하구나. 깨방정을 떠는 데이빗 리 로스와 에디 반 헤일런의 저 상콤한 모습이란. 락음악인데도 신디사이저가 전면에 부각되는 저 스타일은 지금 들으면 좀 촌스럽지만, 뉴웨이브가 세계를 강타하던 시절엔 괜찮았다. 빌보드 1위에 단숨에 올랐던 신나는 노래.

1984년. 난 팝송에 빠져 있었다. FM 라디오를 껴안고 살다시피 하면서 팝송제목과 가사를 받아 적으며 외웠다. 영어단어 잘 모르던 꼬마였기 때문에 DJ 아저씨들이 제목을 빨리 말하거나 모르는 영어단어들로 구성된 어려운 팝송제목이 나오면 울상이 되었다. 그 당시 청춘들의 낭만인 '방송국에 엽서 보내기'도 실행했었고 내 사연이 소개되면 친구들에게 으쓱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MBC 예쁜엽서전도 구경갔었다. 인터넷 게시판으로 해결해버리는 요즘 애청자 문화와는 천지차이. 요새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선 이벤트 추첨할 때 가끔 엽서로 보낸 사연에만 한정하는 경우가 있던데, 정말 쿨한 아이디어 아닌가. 키보드 몇 개 두드려서 보낸 사연과 한 자 한 자 정성껏 눌러쓴 글씨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우체통에 넣어 보내는 사연은 다르다. 암, 다르고말고.

1994년 어느 늦은 밤.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참 반가웠다. 빼어난 노래 실력을 가졌지만 언젠가부터 보기 어렵게 된 가수. 특히 이 노랜 내가 옛날 카세트테잎을 녹음할 때마다 빠지지 않던 곡이라 더 반가웠다. 내 기억에 이 노랜 히트곡까지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던 듯. 찾아보니 아이유와 고 박용하도 이 노래를 불렀더라.

1994년. 질풍노도의 시기. 하고 싶은 건 많고 그걸 해나갈 기술은 부족하던 때. 연애도, 일도 다 잘 해내고 싶었지만 서툴기만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음악을 듣고, 전시회를 쫓아다니고, 힘들 땐 샤워기를 틀고 울었다. 서울의 맛집은 다 꿰고 다니며 한 달에 28일 정도는 돌아다녔던 질주의 나날들.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가수 민해경. 요즘 김범수가 부른 민해경의 '그대 모습은 장미'가 인기지만 유독 내게 잊혀지지 않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 '서기 2000년이 오면'이다. '싸바! 싸바!' 하는 알수없는 후렴구 때문에 동네꼬마들이 따라부르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근데 민해경 씨는 요즘 뭐하시는지?

아, 이 가사 어쩔 건가. '서기 2000년이 오면 로켓트 타고 저 별 사이를 날고, 전쟁도 없이 끝없이 즐거운 세상'이 오게 될 줄 알았는데. 11년도 더 지났지만, 지금의 세계는 이런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다. 하긴, 2003년 4월 7일은 우주소년 아톰의 생일이었다지. 하늘엔 날아다니는 3등신 로봇도 없는 데 말이다. 어릴 적 꿈꾸던 '먼 미래'가 벌써 '과거'가 되어가고 있는 2011년. 그렇다면 먼 미래에 2011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삶을 단단히 완성하고 행복해진 때'라고 추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올해도 벌써 반이나 써버렸다. 아니, 반이나 남았다. 나머진 알뜰히, 쓱싹쓱싹 써야겠다. 바로 오늘부터 말이다.


소보로

2011.07.13 10:52:56

"가끔 어떤 밴드의 '가장 자기답지 않은 곡'이 가장 히트해버리는 경우" <--- 공감합니다! ^^

zizizi

2011.07.15 12:01:25

그래서 정체성 찾는 데 힘든 경우도 있더라구요. Radiohead 같은 경우는 `Creep'을 너무 싫어해서 콘서트에서 아무리 불러달라고 해도 절대 부르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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