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 더위로 이글대는 도쿄 시내에서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는 미타카까진 급행 전철로 삼십분 남짓 걸렸을까. 역에서 내리자 토토로 그림이 그려진 셔틀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내가 진짜로 지브리에 가고 있다는 현실감이 몰려왔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마을 중심을 벗어나자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 눈에 들어왔고 지브리가 가까워진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울창한 숲은 지브리 애니 속에서 익히 봐왔던 그것이었고 난 어느새 메이가 되어 어디 혹시 토토로가 있을까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토토로는 나타나지 않았고 숲을 거니는 동네 주민들의 모습만 보였다. 이윽고 지브리 박물관은 아담하고 고풍스런 느낌으로 나타났고 난 흥분된 상태로 메이의 옥수수처럼 노란 햇살을 받고 있는 커다란 고양이 버스에 올라탔다. 지브리의 주인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사람들을 숲속의 라퓨타성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지브리로부터 날아온 새로운 영화 소식 <마루 밑 아리에티>. 메리노튼의 동화 '마루 밑 바로우어즈: The Borrowers'를 원작으로 지브리가 재구성한 작품이다. 인간들의 집 바닥에 사는 소인들의 이야기로 자급자족이 어려운 소인들이 인간들의 물품을 조금씩 훔쳐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은 '훔친다'라는 표현대신 '빌린다'라고 말하며 만약 빌리다가 인간에게 들킬 경우엔 그 집을 떠나는 나름대로의 규칙속에서 살고있다. 한국 개봉 제목과 달리 일본 제목도 <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즉, 빌려사는 아리에띠로 되어있다. 다시말해 이 작품에서 '빌린다'는 이 영화를 바라보는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부모가 이혼하고 방치된 소년은 심장병으로 수술을 앞두고 요양 삼아 시골의 외할머니댁으로 온다. 그리고 도착 첫날 어릴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할머니집에 살고 있는 '소인'을 직접 목격한다. 하지만 막상 그 소인 소녀 아리에티는 들켰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14세가 된 아리에띠는 아버지로부터 빌리는 기술을 전수받는 첫 날이지만 아리에티의 엄마는 새로운 소년이 나타났으므로 당분간 더욱 조심해야하며 첫 출동을 미루자고 얘기한다. 잘 할 수 있으니 오늘 꼭 가고 싶다는 아리에티. 결국 아버지는 예정대로 아리에띠를 데리고 인간 세상으로 떠난다. 인간의 스케일로는 마루 밑에서 마루 위로 올라가는 몇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아리에티와 같은 소인들에겐 위험 천만한 대여정이다. 자, 아리에티는 무사히 빌리기 데뷔에 성공할까?
지브리는 지속적으로 공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자연과의 공생은 물론이고 티격 태격 싸움하는 적들, 마법 세계의 사람들 심지어 벌레들과의 공생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메세지를 작품에 담아왔다. 이러한 과정 속엔 자연스럽게 지브리의 사회적 발언이 녹아 있는데 최근의 화두는 무엇보다 '살아(남아)라'다. 즉, 공존에서 생존으로의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버블 붕괴 즉 '잃어버린 10년' 이후의 일본 사회는 공존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생존'의 가치에 무게를 더 두게 되었던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던 <골든슬럼버>에서도 언급했지만 구세대가 이뤄놓은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세대는 힘을 잃어버린 구세대의 도움없이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었지만 그들은 현재 나약한 존재. 마치 인간으로부터 빌려사는 소인들처럼.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소인들은 아무리 적게,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이라도 어쨌든 훔치는 건데 어째서 '빌린다'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이 소인들이 요정처럼 인간들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고민 끝에 내린 잠정 결론은 '염치'다. 즉, 소인들은 나름대로의 염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의 도둑질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들은 미안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인간에게 들키면 바로 집을 떠나온게 아니지 않나 싶다. 게다가 잉여에 대한 욕망이 없는 이 소인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후대에는 인간들에게 갚을 수 있는 날(공존하면서)이 오길 희망했기에 빌린다는 말로 이들의 가책을 '유예'시켰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인간도 지구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빌려살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단, 보증과 상환은 계속 후세대로 전가되기에 미처 빌려산다는 생각을 못할 뿐이다. 그러나 욕망을 먹고 사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가속화는 이러한 다음 세대의 생존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아리에띠가 살고 있는 쇼우의 할머니집 사람들은 이미 소인들의 존재를 눈치챘었고 이들의 소소한 도둑질을 눈감아 오면서 자연스럽게 공생을 이뤄왔지만 이미 다른 소인들은 무분별한 개발 또는 공존을 방해하는 집사 아주머니같은 권력에 기생하는 존재들로 인해 그들은 터전을 잃고 이제는 멸종의 위기까지 오게된 것이다. 이는 이미 빌려살고 있는(각종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또는 유사한 시스템으로부터)우리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의 국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된지 오래고 우리 역시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이 빌어먹을 '빌려 사는' 사회의 탈출구와 희망이 있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루 밑 아리에티>를 통해 우리에게 화두를 건네고 있는 동시에 작은 힌트도 주고 있다.
그런데 쇼우의 집을 떠난 아리에티 가족들이 지금쯤 무사히 미타카의 지브리 집에 잘 도착했는지 궁금해진다. 아리에티, 거기라면 안전할거야. 언젠가 다시 그곳에서 마주치면 인사라도 나누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