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노화


오늘 아침엔 김밥을 쌌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밥을 짓고 오이를 절이고 계란 지단을 부치고 단무지와 우엉을 손질한다. 발 위에 김을 펴고 밥과 재료들을 올려 양손으로 힘있게 말아내면 완성.

김밥, 밥과 반찬이 함께 들어있으며 한입에 모든 영양소가 들어가는 완전체. 집어먹기는 쉽지만 맛있게 만들긴 쉽지 않다. 우선 모든 음식이 그렇듯 재료가 좋아야 한다. 밥이 중요하다. 좋은 쌀로 약간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맛있다. 간도 잘 맞춰야 한다. 밥과 재료들에 들어가는 소금과 양념이 모여서 전체 맛을 만드는 거니까. 너무 짜거나 싱겁거나 달면 맛이 없다. 재료들의 식감도 고려해야 한다. 아삭아삭한 재료와 부드러운 재료들이 조화를 이루면 좋다. 그리고 이왕이면 예쁘면 더 좋겠지? 여러 가지 색깔들이 곱게 들어있는 김밥은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니까. 아아, 중요한 게 너무 많구나. 아무튼 맛있는 김밥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론을 다 알고 있는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김밥을 말고 나면 속 재료들이 가운데로 모이지 않고 한쪽으로 몰린다는 거다! 이런 어이없는 고민을 얘기했더니 누군가 밥을 조금, 재료를 많~~이 넣으려는 욕심을 버리라고 충고해줬다. 아, 그렇구나. 난 밥은 조금이고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김밥이 좋던데, 초짜가 그렇게 싸면 속 재료들의 담요 역할을 하는 밥이 모자라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거였다. 김밥을 싸는 덴 평정심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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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간 아이가 도시락을 열었을 때 예쁜 김밥을 먹게 해주고 싶어서 어떤 걸 넣어야 예쁜 색이 날까 고민했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당근을 새콤하게 초절임해서 김밥에 잔뜩 넣곤 했는데, 색깔은 화려하고 예뻤지만 난 그 김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근이 너무 많고 신맛이 강해서 다른 재료의 맛을 다 덮어버렸기 때문. 엄마가 된 지금 생각해봤는데 아마 엄마도 어떻게 하면 예쁜 김밥을 쌀까 궁리하다가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신나게 논 아이들이 돗자리에 앉아 일제히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이 바로 엄마들의 요리 대회다, 무조건 예뻐야 돼!!! 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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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 김밥. 김밥이란 많은 이들에게 소풍의 연관 검색어다.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엄마가 김밥 마는 옆에 앉아서 갓 말아낸 김밥의 꼬다리를 먹곤 했다. 제일 예쁘게 싸진 김밥은 손도 못 댔는데 왜냐, 그건 도시락에 넣어야 하니까. 하지만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김밥의 꼬투리야말로 참 맛있으니까. 불규칙한 모양도 재밌지만 밥에 비해 재료가 많이 들어 맛이 풍부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난 후의 김밥은 옛날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어느 날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프랜차이즈 김밥집에 붙어있는 문구를 보고 우울해진 적이 있다. `24시간 영업합니다’, `김밥 한 줄에 1,500원’. 하아, 한국인의 피로를 상징하는 두 줄이다. 어른의 김밥이란 시간이 없을 때 적은 돈으로 빠르게 끼니를 때우게 해주는 음식인 것이다. 설사 내 접시 위의 1,500원 짜리 김밥이 맛이 없더라도 그 가격을 내면서 불평하긴 좀 어려울 것이다.

녀석도 참 딱하다. 어릴 땐 생각만 해도 신나는 소풍날의 `특식’이다가 어른이 되면 급하게 밥 한 끼 때울 때 먹는 `패스트푸드’가 되어버리니. 음식에도 노화라는 게 있는 것인가. 김밥아, 늙지 마…. 나 같이 엄마가 되어 아이에게 김밥을 싸주다 보면 옛 추억을 생각하며 명예를 회복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영원히 `시시한 패스트푸드’ 꼴을 못 면하겠지. 오늘도 맛있는 김밥을 싸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있는 김밥집 주인님들은 몹시 속상하겠다.

어떤 유명한 김밥집은 계란 지단 대신 가늘게 채를 쳐서 넣어 폭신한 식감을 낸다고 한다. 크림치즈나 매운 견과류를 넣어 승부하는 집들도 있고, 모든 재료를 튀겨서 넣는 집도 있다. 진미채를 넣은 오징어 김밥, 소시지 한 개가 통째로 들어가는 베를린 김밥, 카레 김밥, 돈가스 김밥, 닭가슴살 샐러드 김밥 등 독특한 게 많다. 반면 별다른 재료도 없이 밥에 단무지와 당근 조금 넣고도 `마약 김밥’으로 명성을 떨치는 집도 있으니 오 놀라워라, 깊고도 넓은 김밥의 세계. 지금 이 순간도 전국의 김밥집 사장님들은 `밥 + 김 + 속 재료 = 김밥’이라는 공식 안에서 최대한의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라도 김밥에게 감사하자. 먹기 간편해서 한국인의 도시락 대표 메뉴이며, 즐거운 소풍의 양식이자, 바쁜 이들에겐 든든한 한 끼 식사, 어떤 이들에겐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미식의 대상인, 맛있고 예쁜 김밥아, 고마워. 넌 한국인들에게 생각보다 큰 존재란다. 네 덕분에 많은 어린이들은 추억을 갖게 되고 어떤 어른들은 다시 일할 힘을 내기도 하지. 앞으로도 화이팅! (그리고 글을 쓰다 보니 김밥이 무척 먹고 싶어져서 사러 가야겠다.)

 

글쓴이 : 이지영
광고 만들고 음악 듣고 아이를 키우고 커피를 마십니다. 사소한 것들을 열심히 관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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